profile_circle.png

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행복의 정의

행복의 정의

당신은 자신의 행복의 정의를 어떻게 내립니까?

어떻게 하면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체적으로 난감해집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고민하고 정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면서도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며 삽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나름대로 정리하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리는 정의에 대해 신빙성을 갖지 못하고, 또 내렸다고 해도 지킬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 간단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두 가지 행복론을 정리해봅시다.

첫째는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 관념들이 있겠지만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면 돈을 물 쓰듯 펑펑 쓸 수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죠.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고에 젖어 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명예나 자신이 하는 일에 최고자가 되는 것입니다. ‘돈은 필요 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잘하거나 그것을 인정받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으세요? ‘둘 다 갖추어야 행복하지 않을까?’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것은 욕심이고, 이것을 이룰 가능성은 훨씬 희박합니다. 실제 세상에 돈과 명예를 다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불쌍한 일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욕망이 많은 사람들인데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아무것도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 다른 관념이 있는데 그것은 청빈이 곧 행복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아무 것도 없이 시골로 내려가 밭에 나가 땅에서 나물을 캐서 그날그날 먹고 사는 그것이 행복하다고 보는 것이죠. 그리 많은 지지자를 갖지는 못하지만 이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말하다 보면 ‘행복의 정의를 내리기란 참 쉽지 않구나!’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행복에 대한 연구는 학문이 생긴 최초부터 다루어져 온 제목이지만 아직도 딱 떨어지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답을 찾지 못했고, 또한 수천 년이 더 지나도 답을 찾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연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연구는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은 지속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행복에 더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행복은 무엇에 도달하거나 무엇을 쟁취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얻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고, 또 행복은 자신이 느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내가 기업의 사장이 되고자 한다거나 교수, 혹은 어떤 전문가가 되고자 할 때, 된 것이 행복하다기보다는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이룰 희망이 보일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얻고자 한 것을 얻었거나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갖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은 행복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일시적이고 유동적일 뿐이죠. 얻는 순간, 성취감에 행복을 느끼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해 우리에게 공기처럼 느껴집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행복은 자기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하고,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은 거거든요.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가는 희망에 차는 것이며, 또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고, 그것이 행복한 것이라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결과로 행복해질 것이라고 단정하면 그것을 이루는 것을 노동과 고통으로 보고, 이루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하면 좌절감, 자기 상실감에 빠지고, 고통 가운데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무기가 되거나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내가 괜히 복잡하게 여러분의 생각을 끌고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행복을 원한다면 이런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정리한다면 행복은 자신이 느끼는 주관적인 것이며, 어떤 일을 이루었을 때보다는 이루고 있는 희망적인 과정에 있는 것이고, 그것을 스스로 행복이라고 믿는 것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는 것 즉 물질이나 명예 등을 얻음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물질과 명예는 행복과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들은 필요한 도구가 될 수 있고, 없으면 힘든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행복의 결정체가 되지도 않고, 그것을 믿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저녁이 되면 길거리에 나와 기타를 치면서 연주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주면 목례를 하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자주 지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그를 측은히 여겨 “젊은이 왜 이렇게 힘들게 사나? 내가 자네에게 일자리를 소개시켜 줄게.” 그는 하버드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소개한 곳으로 가면 자네는 큰돈을 벌 수 있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걸세.” 그 젊은이는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난, 이것이 행복한데요.” 그 행인은 불쾌히 여기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이 젊은이는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므로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인은 그렇게 하면 행복하지 않다거나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간다고 확신하고 있은 셈이죠. 행복에 관해서는 기타치고 노래하는 젊은이가 맞는 것이죠. 이것이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이냐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40:4)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수단들은 우리 생을 꾸며주는 액세서리나 도구라고 할 수 있죠. 나 자신이 없고 액세서리가 가득한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내가 있어야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갖게 되죠. 내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세상의 속된 것들에 눈길이 가지 않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하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죠. 우리는 액세서리 하나 없어졌을 때 없어진 하나 때문에 불행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액세서리는 바꾸면 되는 것이지만 나는 바꿀 수 없어요. 나의 중심에는 영혼이 있고, 우리의 영혼과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에요.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62:5)

가데스 바네아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