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ile_circle.png

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가데스 바네아

지난 청년 주일 설교제목입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성경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모세의 인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정탐꾼들을 보내 정탐을 시킨 장소입니다. 애굽을 떠난 지 근 2년 만에 드디어 가나안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이 위치는 가나안에서 불과 80km떨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긴장되고 어수선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저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나님이 저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별 탈 없이 들어가 저곳을 차지하고 살 수 있을까?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할까?” “우리가 들어가는데 저곳에 사는 사람들이 곱게 땅을 내어줄까? 이미 그들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쫓아내라고 하셨어. 그들과 함께 살 수는 없을까?” 등등의 수많은 상념들이 그들의 마음을 들쑤시고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의혹을 나눌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2지파 각 한 명씩 가장 영리하고 날쌘 사람을 뽑아 정탐꾼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이 차지해야 할 땅을 정탐하고 그 사실을 놓고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를 모색할 것입니다. 그런데 2개월 만에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에 백성들은 간담이 녹아내렸고, 눈에서는 절망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해도 입에서는 낙담과 비참해진 자신들의 마음을 토로하듯 신음과 울음을 터져 나왔습니다. “아, 이제 우리는 죽었다.” “죽으려고 애굽을 떠나 여기까지 온 것인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한 말이 이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들어가 싸울 수 없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나는 식물들을 먹어서 덩치가 크고 힘이 셉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은 견고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이 말에 어느 누가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 통곡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렇게 믿음이 없고 절망에 빠진 자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으로 진격하자고 해도 갈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그 명령은 공허한 소리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 근처 광야를 38년 동안 배회하게 됩니다. 왜 38년이냐고요? 성경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는 세대교체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한 마디로 이런 뜻이 되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죽고,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 믿음으로 무장해서 들어가게 하겠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이 가데스 바네아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청년의 시대는 ‘가데스 바네아 시대’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뻔히 앞이 보이지만 망설여지고, 과연 여기서 발을 옮기는 것이 잘한 선택인가에 대해 의심을 갖는 시기이니까요.

가데스 바네아는 ‘바네아의 가데스’라는 뜻입니다. 즉 그곳의 족장 이름이 바네아가 아닌가 하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곳은 가나안을 들어가기 전에 모든 길이 모이는 곳이고, 오아시스입니다. 그리고 ‘가데스’가 ‘성소’라는 뜻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마 이방 우상숭배의 장소이기도 했겠지요. 이렇게 보면 가데스 바네아는 그들을 마비시키거나 소극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장소 즉 망설이게 하는 자리가 됩니다. 오아시스의 안식, 이방 우상의 화려함, 여러 상인들이 있으므로 물품의 조달 등으로 어쩌면 그냥 이곳에 눌러 앉기에 적당한 곳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것은 실패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목적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땅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차지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알게 되자 좌절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런 곳인지 모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고 이 자리까지 오게 했을까요? 하나님이 이곳으로 오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게 하려고 하신 것일까요? 이 점을 그들이 곰곰이 생각하고 기도했었어야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은 좋은 곳이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들어가야 할 낙원과 같은 곳이어야 한다고 기대합니다. 최종적으로 갈 천국은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은 게으른 우리가 원하는 곳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찬양하게 하는 곳이지요.

정말 가나안 땅은 그런 곳일까요?
주목해야 할 점이 무엇일까요?
우선,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것은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그러나 그 땅을 차지하는 것에는 자신들이 역부족이라는 점이 넘지 못할 산으로 보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눈의 현실을 보느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가능한 우리의 능력과 현실의 벽은 실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하시고 보내신 하나님은 더욱 실제적이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진격해 갈 수 없는 일이죠.

‘오늘에 적당히 안주하려는가, 더 나은 내일을 추구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그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광야에 비해서는 훨씬 낫습니다. 오아시스니까요. 그러나 이곳 또한 자신들이 마음대로 차지할 땅은 아닙니다. 왜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곳 사람들과 다툼이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추측 건대 그곳 족속들이 자기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이스라엘 사람과 상대해서 싸우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차피 그곳을 차지하고 살려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하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았겠죠. 그렇다면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별 탈이 없이 기거할 수 있는 이곳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용이하고 안전하다고 봤겠지요. 싸워도 이길 승산이 높으니까요.

간과하고 넘어 가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곳은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서 손에 넣어야 하는 사명을 갖는 것이지 나는 가만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내 손에 넣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에서 이탈하거나 부실해지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게으름의 문제입니다. 신화나 신비주의의 방식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 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해칠 수 있는 인간의 불신앙이지.”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약 먹을 때 기도하면 믿음이 없는 짓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믿으면 무엇이든지 우리 손에 넣어주시는 것을 즐겨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뜻을 행할 때 약속하신 것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보면 가장 건전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고 했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으니까 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고, 그냥 힘들이지 않고 차지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더 잘 아시고 그에 따라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가데서 바네아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이루기 시작하는 곳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들의 머뭇거림이나 좌절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믿음을 키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누구나 삶을 살면서 가데스 바네아에 서게 됩니다. 거기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은 당신의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믿음의 행위를 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셔서 복을 내리기 원하십니다.

없어서는 안 될, 많아도 곤란한

없어서는 안 될, 많아도 곤란한

행복의 정의

행복의 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