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신앙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천국 이야기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렇게 된 것은 목회자가 설교 상 천국을 언급하지 않거나 천국에 대해 간절한 소망으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 땅의 삶에 너무 강조한 나머지 땅을 보느라 천국을 볼 새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신앙의 목적이 이 땅의 형통, 축복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트렌드인지 모르지만. 이 땅의 삶이 재미있어진 것이다. 이제는 천국 오라고 할까봐 겁난다. 어느 목사님이 한 말. 그 분은 뉴질랜드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다. 하루는 해변에 나가서 한 부인이 있어 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 부인이 정색을 하면서 “여기가 천국이지 어디가 천국인가요?” 말하더라는 것이다. 아무 답을 할 수 없어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줄곧 생각했다. “뉴질랜드 해변이 천국보다 좋은가?” “그 여자 분은 천국을 해변 이상으로 상상할 수 없는가?” “그 목사님은 왜 그 말에 답변을 못한 걸까?” 등등 어느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천국에 대해 설교하니까 한 할머니가 예배 후 목사님에게 항의했다. “목사님, 천국이 그리 좋으면 목사님부터 먼저 가면 되지 왜 자꾸 우리보고 가라고 그래요?” 그 목사님이 어떻게 답했을까? 그런데 그 젊은 목사님은 다른 교회로 이동하고 나이가 든 목사님이 부임해왔다. 그 목사님도 천국에 대해 설교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불쾌해 하며 말했다. “목사님, 천국에 가봤습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천국가라고 하세요?” 목사님이 답했다. “지난 번 김 집사님이 천국에 가셨지요? 그곳이 얼마나 좋기에 안 돌아오시겠어요.” 이것은 어느 책에서 본 것을 기억을 살려서 정리했는데, 제대로 됐는지 모르겠다. 천국을 표현할 때 이렇게 하면 될까? 위의 말은 웃고자 지어낸 말이지 이런 대화는 실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 바울이 환상 가운데 갔다 온 곳은 ‘낙원(셋째 하늘)’이라고 했지 그것이 천국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또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 기록한 천국에 대해서는 세상적인 표현들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길이 금이고 홍보석이 박혀 있고 등의 말이 이 땅에서 사용되는 표현이지, 천국에 실제 가면 금 길이 필요할까? 이 세상에 아무도 실제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시하여 바울 등 사도들이 줄곧 외친 것이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는 것이다. 이곳이 어떤 곳일까 시각적인 표현은 뒤로하고 하나님이 계시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곳이라고 계시록(21:4)에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곳이다. 어느 날 우리는 ‘천국’을 잃어버렸다. 설교단상에서 ‘천국’이라는 단어가 서서히 줄다가 뚝 끊어진 것이다. 지금 목사님들이 6,70년 전의 목사님들처럼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 외치지는 않는다. 천국이 없어서일까? 천국을 외치는 것은 시대적으로 어울리지 않아서일까?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삼가는 것일까? 어디에 그 원인이 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건전하려면 천국을 향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개의 턱이 존재한다. 하나는 천국을 추구하는 사람은 현세의 삶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분류될 수 있고, 또 하나는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지함으로 가는 곳이 천국이므로 현세에 집중하는 것이 현실적인 신앙이라고 보는 것 같다. 우리의 현실적인 삶이 특별히 어려운 때가 있었다. 정말 그들에게 천국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현재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것이 아닌가 판단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거나 체험하게 하는 수단으로 방언, 계시, 신유 등을 강조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호응했다. 이렇게 현실적인 복을 받는데 집중하다보니 슬며시 내세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천국 갈 생각이라도 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역사가가 기독교가 세상에 미친 악영향은 위로와 천국을 사람 마음에 심어주어 어려운 현실에서 위로와 내세를 바라면서 권력에 복종하고 현실을 감내하게 한 것이라고 했다. 그 사람의 말은 바른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현실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성도들에게 천국을 바라보며 살게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무능하게 살게 하지 않으신다. 오늘 주의 뜻을 이루며 천국을 향해 사는 진지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라신다. 왜 상급이라는 강력한 표현을 성경이 하겠는가? 왜 이런 사람은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 신앙의 행위를 언급하겠는가? 진정한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함께 보는 것이다. 과거의 흔적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나갈 때 진정한 현재이지, 오직 현재만을 사는 자는 현재를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정욕에 따라 오늘 사는 것일 뿐이다. 그에게 미래는 없다. 오늘을 잘 살면 미래가 밝은 것처럼 말하는데, 미래가 없는 자는 오늘을 잘 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천국이 없는 사람은 오늘을 힘차게 살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 가기만 하면 된다고 쉽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천국에 오기를 바라시는가를 살펴보라. 천국은 우리의 삶을 강인하게 하는 끝없는 희망과 행복의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