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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흙수저, 금수저

아마 이 단어를 보자마자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뭘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청년 일자리를 놓고 시끄럽게 술렁이고 있습니다. 세상은 발전하여 더욱 복잡해졌는데 일자리는 점점 줄고 있는 상황이고, 또 이런 현상은 어느 나라든 예외가 아닙니다. 컴퓨터 산업이 발달하고, 교통통신 수단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노동을 기계들이 대신함으로 점점 줄고 있는 반면 임금은 높아지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이런 고민은 정도와 질의 차이는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별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나는 흙수저였나? 금수저였나?”생각해봤습니다.

청년 시절 어디에 취직을 할 것인지 불안하고 두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금수저는 분명히 아니고, 흙수저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가정 형편은 녹록치 않았지만, 아버지는 중고등학교 교감, 교장선생님을 하셨으니까요. 어린 시절 다른 집에서 발화된 불이 옮겨붙어 화재를 당했는데 알몸으로 탈출했고, 형제들이 많아 근근이 생활을 이어온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니 수저 이야기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흙수저, 금수저’라는 말은 사실 일본만화 ‘은수저’에 기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은수저’의 내용은 도시에 살던 학생이 학업성적이 좋지 않아 시골 농업학교로 전학 오면서 그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시골학생들이 볼 때 그 학생은 ‘은수저’인 것이지요. 이것이 발전해서 우리나라에서 부자의 부모를 둔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고, 가난한 부모를 둔 사람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비하적 표현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이가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데 부자 부모를 두면 경제적으로 훨씬 쉬울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좋다고만 볼 수 없고, 그것을 절대화시키는 것 자체를 자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부잣집 자녀들이 자신의 여건만 믿고 인격수양을 하지 않거나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그리 부러운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들을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나약하고 게으름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말을 하지만 실제 일을 당해보면 힘들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결혼을 할 때 부모가 집을 사주는 경우와 월세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번 돈의 대부분은 월세로 들어가고 그 나머지 돈으로 빠듯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내 집 마련하는 것은 요원한 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자로서 이런 사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더 좋아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기업을 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 상태나 정치하는 사람들의 비난하는 쪽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놓고 생각을 모아야 한다는 쪽입니다. 운동하는 선수들을 보면 흙수저, 금수저를 따질까요? 금수저인 사람은 거의 운동선수와는 거리가 멀다고 보고(운동선수들 가운데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있지만 드물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재능과 연습으로 우열을 가립니다. 아무리 부모가 뒷받침을 해줘도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없지요. 좋은 선수들을 보면 대체로 흙수저 출신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이 없이는 어떤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어쩌면 흙수저이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을 우리의 상황에다 갖다놓고 적용하면 어떨까요? 오늘 우리가 수저 타령을 하는 것은 어쩌면 신세 한탄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적당히 해서 살 수 있는 환경을 갖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오는 말이 아닌가 하는 우려입니다. 이 말에 상처를 입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위인들은 대부분이 다 흙수저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위인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럼에도 내가 이 말은 끄집어내는 것은 사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거나 위축되기 때문에 그들과 거리가 멀다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디모데후서2장 20-21절)

그릇의 의무는 값비싼 것에 있지 않고 얼마나 유용하게 쓰임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여러 가지의 그릇 종류가 있지만, 주인의 손이 늘 가는 그런 그릇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마 이 성구를 보면서도 “난 그래도 금그릇이 되고 싶어!”라고 외칠지 모릅니다. 이런 생각이 당신을 스스로 불행한 함정에 빠트리는 것이지요.

나의 이야기를 간단히 해본다면 나는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비교해서 내놓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이상하게 나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싫었고, 똑같이 여김을 받는 것도 싫었습니다. 청년 시절 나 스스로 다짐했지요. “나는 내 길을 갈 것이고, 나만의 가치를 살려 그것에 충실하게 살겠다.”내가 흙수저가 되었든, 나무 수저가 되었든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념이 오늘 나를 만드는 것이었고, 자체가 바로 경쟁력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신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누구와’, 혹은 ‘누구보다’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므로 나의 가치를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산다. 내 몫에 충실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이것이 내가 사는 방식입니다. 어쩌면 내가 흙수저를 극복한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흙수저를 들먹인다는 것은 벌써 나 스스로의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고, 나의 앞날을 내가 단정하는 느낌이 듭니다. 나는 나의 힘으로 살아야지 누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부모와 형제가 다 나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하나님 안에서는 당신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교회

난 이렇게 살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