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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올림픽- 경기, 경쟁, 사투

2016년 리우 올림픽이 얼마 전에 끝이 났습니다. 우리나라는 메달 수(9,3,9)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순위(8)는 달성했다고 절반의 성공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경기가 있으면 온 세계가 주목하고 밤잠을 설치면서 시청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매 경기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각 나라를 대표해서 나온 선수들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봅니다. 금메달을 따기 위해 서로 겨루어야 하고, 한 번이라도 지면 탈락한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갖은 애를 씁니다. 어쨌든 상대를 이겨야 하니까요. 그 결과 세계에서 제일 강한 선수가 입증되었지만 얼굴이나 몸에 온통 부상을 안은 사람들을 쉽게 봅니다. 달리다 넘어지기도 하고, 반칙패를 당하기도 하고, 경기를 할 때 서로를 넘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고 싸우다가 마치고 나면 얼싸안기도 합니다. “조금 전까지 서로를 노려보면서 적처럼 여기고 겨루다가 마치고 나서 그런 마음이 생길까?”“혹 위선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멋진 경기였어!”“잘했어”“아쉽지만 훌륭했어!”이런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요? 어떻게 보면 경기이고, 어떻게 보면 경쟁이고, 어떻게 보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든 부분에서 경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경쟁을 통해 상급학교에 가고, 경쟁을 통해 취직을 하고, 경쟁을 통해 진급을 합니다. 이런 것이 싫어서 사업을 시작하면 또 사업자끼리 경쟁을 해서 꾸려나가야 합니다. 이런 경쟁이 싫어 귀향해서 시골에서 조용히 사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런 삶도 경쟁을 피해서 갔지만, 경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연과 경쟁입니다. 더우면 더위와 경쟁해서 내가 가꾸는 작물을 잘 자라게 해야 하고, 추우면 추위와 싸워 내 것을 보호하고 추위를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경쟁이라는 것을 벗어날 수 없고, 경쟁이라는 삶을 통해 유지되고 발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이 열리고 선수들이 메달을 따기 위해 상대방과 겨루는 경기를 보면 왜 아름답게 보일까요? 선수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올림픽에 나오기 전, 너무나 힘든 훈련과정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훈련을 해서 나가, 또 사투를 벌이면서 경기를 해서 메달을 따야 하는가? 아마 그토록 얻기 힘든 것을 얻었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했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그런데 레슬링 선수가 굳이 올림픽에 나가지 않더라도 놀라운 기량으로 동네에서 싸움을 한다면 아름다울까요? 그렇지 않겠죠? 동네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릴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어떻게 다르기에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것입니까? 공식과 비공식, 심판이 있는가와 없는가, 룰에 따르는가와 룰이 없는가 등등 이런 것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엄청난 싸움이라도 주관자가 있고, 심판, 룰이 있으면 큰 싸움일수록 사람들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싸움이 진행되고 처절하게 이기면 이길수록 아름답게 보입니다. 사실 모순이지만 우리의 삶이 경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룰 아래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자기화하고 대리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것을 상업적으로 만들어 흥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때 프로레슬링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이었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선인과 악인’이 등장합니다. 링 위에서 두 사람은 피 터지게 싸웁니다. 피 터지지 않으면 재미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피 터져야 하는가? 악인이 아니라 선인입니다. 악인이 피 터지고 그가 지는 장면이 연출되면 그날은 재미있지만, 다음 경기에는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흥행사들은 이런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서 악인의 반칙에 선인이 피 터지게 합니다. 그러면 관중들은 선인을 응원하며 흥분합니다. 여기에 양념을 더합니다. 악인이 반칙을 해놓고 손을 번쩍 들고는 자기가 이겼다고 외치거나, 심지어 미국 프로레슬링 같은 경우를 보면 반칙왕이 일본 복장을 하고 나오는데(오래전 이야깁니다) 일장기를 들고 “반자이(만세)”하고 외칩니다. 그러면 구름 같은 관중들이 흥분을 하고 난리가 납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 반칙왕은 링을 떠나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관중들은 더욱 흥분하고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보러 와야지!”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이 상업적이며 연출된 쇼가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 없습니다.

왜 이런지는 이미 말했지만 우리는 경쟁을 통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열망이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룰 안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 선수와 동일시되어 이기고 싶은 것이지요. 이 싸움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힘들면 힘들수록, 피를 말리면 말릴수록 재미있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을 내가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콱 막힙니다. “난 못해!”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올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쟁을 받아들이고, 또 멋지게 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이런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보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 제안을 하자면 우선, 적당한 일을 고르는 것입니다. 너무 센 상대와 만나면 매번 패배를 하겠지요?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전의를 상실하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반대로 너무 쉬운 상대를 만나면 매번 이기지만 발전도 안 되고, 재미도 없어집니다. 자신의 현재 역량보다 조금 더 높은 것을 상대로 정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성실히 임하는 것입니다. 매번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발전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신뢰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놀면서 어느 날 한탕으로 잘 되는 사람은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심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경제적인 삶은 별 어려움이 없다 해도 멋지다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세 번째는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기에서 이기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도 “저 선수가 해냈구나!”라는 면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짜릿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다음이 중요한데,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상대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몸을 위해서는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정신적으로 거기에 맞게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인간은 얼마 가지 않아 시들해져 버립니다. 남을 위해 좋을 일을 하는 것.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인간 가운데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무엇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취 위의 단계가 봉사나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희생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비록 한 선수나 사업가가 멋진 성취를 이루었다고 해도 타인에 대해 베푸는 행동이 없으면 짐승의 목에 메달을 건 것과 같은 느낌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꼭 예수를 믿어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런 일들이 행해진다면 더 온전하고, 더 멋진 것이 됩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예수를 좋게 하라고?”라는 생각이 마음에 생긴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비록 교회를 다닌다 해도 신앙하는 사람이 아니라 욕망을 채우기 위한 신앙 즉 신앙을 이용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온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그 어떤 경쟁도 경쟁이 아니라 경기가 되고, 사투가 아니라 극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심판이고, 하나님의 룰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주최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쇼가 아니고 진실이며, 이것은 단순히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니까요. 당신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를 바랍니다. 

    

   

결실

내가 추구하는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