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봄이 시작되는 달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금년 시작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고 재출발을 다짐하는 때이기도 하고, 아직 겨울 기운이 남아 있다 해도 봄이 되었다고 믿어도 되는 달이기도 합니다. 성급하게 봄이라고 판단하면 탈이 나기도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종종 TV를 통해 운동경기를 보면 감독이 작전타임을 부르고 선수들을 모아 하는 말이 “자, 다시 시작해! 다시 시작이야?!”하는 말을 듣는 게 되는데 바로 그 말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할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수없이 ‘다시’라는 말만 반복하다 끝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고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희망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삶의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크고 작은 희망에 의해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있다 점심 먹어야지.” 이것도 희망입니다. “이 나라를 살려야지.” 이런 원대한 것만 희망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어 있어야 하거나 있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가리켜 희망이라고 합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희망이 있고, 희망을 갖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학창시절 누구나 경험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참고서를 구입해놓고 얼마 보지 못하고 그냥 방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책만 보면 “얼마 보지 못할 것인데 뭐”라고 스스로 단죄해버림과 동시에 정말 책을 보지 않습니다. 아마 영어책을 구입해서 명사 첫 부분만 보고 끝낸 참고서가 여러 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참고서를 구입해서 “이번만은 어디까지는 꼭 본다.” 그리고 힘들지만, 그것을 지키게 되면 그다음에는 책을 끝까지 보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희망을 꺾어 절망을 심어주면 더 이상 어떤 일이든 할 맛이 나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희망을 다시 불어넣어 재출발을 할 수 있을까요?
자기 내면에서 하고자 하는 욕구가 불타오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해도 절망의 늪에 빠져 고통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 내가 지금까지 탐구한 모든 자료에서 확인된 사실입니다. 현대의 가장 뛰어난 화가라고 하면 피카소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피카소가 왜 대단한지 알 수 없다고 말하겠지만 그림에 대해 아는 사람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충격을 받습니다. 피카소는 1881년~1978년까지 살았던 사람으로 우리와 가장 친숙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그림에 얼마나 많은 화가가 충격을 받아 좌절을 느끼고 질투하고 그림그리기를 그만둘까 하는 일들이 벌어진 지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카소는 많은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아몬드처럼 사람 얼굴을 비대칭으로 그려 유명한 모딜리아니는 항상 피카소를 보면서 좌절과 분노를 느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그의 그림이 1억7천 40만 달러에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그토록 유명한 사람이 그랬다는 점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미국을 대표하는 잭슨 폴락(이 사람의 그림은 ‘드립 드로우잉’ 즉 물감을 뿌리는 그림)도 피카소가 그림의 모든 것을 혼자 다 해먹었다고 좌절했다는 기록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피카소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로부터 나온 그림기법이 내가 아는 것만 해도 4가지(예, 입체파, 추상파 등)가 될 정도로, 양식을 만들어 낼만큼 독보적인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이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었고, 심각했지요. 그가 스페인에서 파리로 와서 한참 동안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경제사정이 형편없었고, 사람들은 “무슨 그림이 그러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그가 그린 그림이 괴상하고 단순해 어린 아이가 낙서한 것처럼 보여 “저런 정도면 누구나 다 그리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이지요. 그러니 당시 사람들은 더욱 심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가 15세 때 그린 그림을 보면 평이 달라집니다. 저렇게 잘 그리는 사람이 왜 점점 더 이상하게 그릴까?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뭔가 뜻하는 바가 있을 거야, 라는 것이 우리 일반사람들이 갖는 생각입니다. 피카소가 많은 화가의 기를 죽였지만, 자신을 기죽인 사람이 있습니다. 앙리 마티스라는 화가인데 이 사람을 야수파라고 하고, 색채의 마술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피카소가 앙리 마티스만 보면 기가 죽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선의의 경쟁자로 발전했다고 하지만….
이상하게 말하다 보니 오늘 피카소에 대해 좀 길게 설명했군요.
어쨌든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심각한 좌절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시작’이라는 것, 즉 재기가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운동경기에서 감독이 외치는 말을 들어보세요. “자, 다시 시작하자! 다시 시작이야!” 이 말은 당신이 당신의 인생에게 말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인생의 끝자락에 왔다 할지라도 남아있는 만큼은 새로운 기운을 차려 살 수 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라면 더더욱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만이 아니라 파이팅을 외치고 다시 경기장으로 들어가 플레이를 하는 것이지요.
하나의 그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아십니까?
작은 점입니다.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선들이 모여 그림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내가 살았다는 것은 무엇에 이끌려 살았다기보다는 내가 그린 그림입니다.
내가 어떤 점들을 선택해서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 말은 어떤 점들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왜 나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욕망과 의지를 가르는 것이니까요. 욕망은 우리를 이끕니다. 그러나 의지는 욕망을 거부하기도 하고 선택도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또 인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운수에 맡겨야 할까요? 그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점은 모든 근본을 하나님께 두고, 모든 삶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은혜는 하나님을 선택할 때 얻어지는 것들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가 인도하심을 받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 우리가 인도하심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잘하고 있어요. 흔들리지 말고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