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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무슨 재미로 사는가?

무슨 재미로 사는가?

내가 처음 목회를 시작한 곳은 농촌인데, 좀 특이한 곳이었다. 공단 근처 사원 아파트 옆에 교회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은 주로 대기업 공장직원 가족들이고 원주민들이 20%였다. 부임한 이후 남자들이 속속 들어와 여성들이 많던 교회가 점점 비슷한 숫자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예배 후 회사의 고위간부인 어떤 성도가 나에게 물었다. “강도사님(그 시절 나는 강도사였다.)은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은 웃으면서 설명했다. “우리는 회사를 마치고 나면 회식도 하고 모여서 파티도 하고 잡기를 하며 노는데 강도사님은 그런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궁금해서 여쭈어 봤습니다.” 그제야 나는 그 사람이 무엇을 뜻하지는 알고 미소 띠며 말했다. “재미있는 것 많습니다.” “뭔데요?” 더욱 궁금해지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운동도 하고, 설교준비도 하고, 가끔 친구들도 만나고.... 뭐 재미있는 것이 많지요.” 내 말을 동의하기 어렵다는 듯이 “그런 것은 재미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공부와 비슷한 것이니까 우리는 따분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도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면 그 재미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더 좋습니다.” 그분은 일류대학을 나온 대기업의 최고 간부 중에 한 사람이었으므로 오히려 내 쪽에서 그분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입장이었다. 그분이 말하는 것은 술 마시고, 담배피우고, 잡기(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짐작은 간다.)를 하는 등등 세속적 퇴폐한 것들 칭하는 재미이며, 마치 나를 간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런 세속적인 방법으로 즐기는 것을 ‘즐긴다’고 말하고, 다른 것들은 즐거운 것에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반대이다. 술 마시는 등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전혀 즐거운 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돈도 들고 몸도 버리는 건전한 즐거움이 아닌 것이 무슨 즐거움인가 하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실제 사람들은 세속적인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거기에 물든 사람은 그것 아닌 다른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고 여기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권장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끊어야 한다. 그 즐거움에 빠지면 삶이나 가정이 온전할 수 없다. 그러니 그런 것을 안 하는 것도 즐거움이라고 믿고 있다. 안 하는 즐거움! 책 읽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강요되어 온 공부와 연관을 시키기 때문에 골치 아프거나 따분한 것으로 여기는데, 책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고 더 나은 생각을 접하게 되어, 내 생각의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면 이것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저런 분야의 책들을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다. 거기에 이 책 저 책을 읽으면 다양한 지식을 얻게 되고 실제 일을 해나가는 데 상당한 사고적 도움이 된다. 일거양득인 셈이다. 음악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로 클래식 그것도 거의 고전파에 국한되어 있고 그것도 아다지오 유형을 좋아하기 때문에, 진정한 음악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기보다는 음악 소비자일 뿐이다. 하루 내내 나의 묵상과 안정을 위해 소리를 약하게 해놓고 듣지만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참 기쁘다. 같은 곡도 연주자에 따라 느낌이 다른데 그런 것을 느끼는 것도 재미있다. 어떤 경우는 연주가 거슬리는 부분도 있지만 내가 듣는 음악은 그런 것에 상관이 없는 곡들이 많다. 그 외에도 많이 있다.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설교를 준비하거나 설교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이 일은 정말 부담스럽고 힘이 든다. 그러나 이것이 내 사명이고 그냥 쉽게 넘겨서는 안 되기 때문에 준비하는 시간을 많이 들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면 한 편의 설교가 나오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나에게 1시간을 주고 준비를 하라고 하면 그렇게 준비할 것이고, 100시간을 주어 준비하라고 해도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할 것이다. 그 이상 시간은 필요 없는가? 아니다. 더 주면 더 준비할 것이다. 그러니 설교준비란 끝이 없다. 항상 완성된 작품을 들고 설교를 한다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시간에 준비한 설교를 들고 설교단에 올라간다고 보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준비에 얼마나 많은 책들을 연관시켜 생각해야 하고, 얼마나 많이 묵상해야 하는지를 알면 아마 누구도 목사가 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의 과정 가운데 느끼게 되는 은혜와 희열은 세속적인 것이 주는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또 이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고통 받거나 혼란 속에 있는 성도들이 위로를 받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른 길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면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이런 재미를 느끼는 자가 세속적인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여길까? 사람은 항상 자기가 즐기는 것만 즐거운 것이고, 다른 것들은 즐거움에 속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속된 즐거움을 갖게 되면 신령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신령한 즐거움으로 가려면 속된 즐거움을 버려야 하고, 그 맹맹한 즐거움을 즐겁다고 하면서 따분한 삶을 살 것을 생각하면 두려울 것이다. 신령한 즐거움의 맛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누구든지 신령한 즐거움을 갖는 것이나 퇴폐한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 즐거움을 안다면 그런 것들은 자연히 가까이 하지 않게 된다. 어리석은 일이고 손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무슨 재미로 사냐고? 사람은 다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재미를 만들어 즐길 수 있다. 세속적 관점에서의 즐거움에 고착되었거나 숙달된 사람은 그것 외에는 즐거움이 없는 줄 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자기를 망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성경 읽는 것도 재미있다. 이 말에 화들짝 놀라겠지만 정말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되고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 읽으면 어느 순간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그 내용이 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하면 성경 읽는 것을 재미로 여길 것이다. 오해하지는 말라. 성경을 재미로 읽는 것은 아니지만 신령과 신앙의 말씀들을 재미있게 읽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어느 유명한 소설가에게 취미가 뭐냐고 기자가 물었더니 고전소설 읽기와 음악 감상이라고 했다. “에이, 그게 무슨...”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 사람은 어떤 소설을 일곱 번이나 읽었다고 했다. 대개 그런 식으로 읽는다고 한다. 우리는 그 사람을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 사람이 쓴 소설을 즐겨 읽는다. 밀리언셀러이다. 그것도 한두 권이 아니라 여러 권. 무슨 재미로 사냐고? 어떤 일에서든 재미를 찾지 못한 사람, 진정으로 자신에게 유익하면서도 발전시켜 주고 즐거움을 주는 재미를 만들어 내지 못한 사람은 시간과 돈을 탕진하면서 몸까지 버리는 즐거움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낭비해 버린다. 우리에게 필히 찾아내야 할 즐거움은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식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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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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