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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고통을 받는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고통을 받는가?

우리의 신앙은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가 고통을 받는가?” 하는 질문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신앙이 좋으면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괴상한 관념이 우리 가운데 자리를 잡았을까요? 신비주의자들이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평화를 얻고 나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세상의 고통은 다 지나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남았다.’라고 주장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 내용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짜깁기를 해서 만든 사이비 신앙의 표현입니다. 듣기는 좋지만 진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이 말이 맞다면 바울이나 초대교회 성도들, 그리고 지금까지 믿음으로 순교하고 고통을 받고 살았던 삶은 모두 예수를 바로 믿지 못했거나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축복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높인다고 예수님이 좋아하실까요?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 자체이지, 누가 더 높인다고 더 높아지고 낮춘다고 더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이것과 비슷하지요. 십일조를 많이 내면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라는 괴신앙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고통에서 구해내시고, 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고통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것만이 우리 신앙의 기준은 아닙니다.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도 하시고, 또 고통 속에서 우리를 다루어 성숙시키는 도구로 삼으시기도 합니다. 바울도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고민을 했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 집중기도를 몇 번이나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는 설득을 당합니다. 나의 약함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난다는 것이었죠. 하나님은 자신에게 가시를 주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신다는 깨달음도 받았고요. 얼핏 보면 자기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게 되면 이런 ‘이해됨’, ‘수용’, ‘통찰’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극복하게 하시든지, 그것도 아니면 그 사람은 고통의 장애 때문에 무너지든지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까요? “모든 것에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가 고통에 빠질 리가 없지 않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공통적인 관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에 대해서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지혜에 미칠 수 없으니 단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사고를 해볼 수는 있는데, 우선 우리 인간은 약해질 때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으면 그럴 리 없어!”라고 큰소리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심지어 성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교수라 할지라도,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의 삶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는 간격이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후자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것은 다 알면서도 실패와 절망, 아픔과 고통의 통로를 거치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나의 마음 속 깊이 역사하셔서 그 고백을 끌어내십니다. 그때 제대로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쁠 때도 함께하시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언제 하나님 말씀이 잘 들리는가 하면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기묘하게 잘 들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더욱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앙인이라면 인생의 고난의 폭풍우 가운데 하나님의 평온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겸손하게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고통을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수없이 우리에게 고난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고난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즐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과 거리가 멀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불필요한 고난에서 건지시기도 하시겠고, 피하게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아야 하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보다 위대하지 않다면 아브라함의 가나안 여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모세보다 위대하지 않다면 광야 80년 생활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다 채운다고 했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 자체가 저주라고 생각하면 앞서 그들이 주장한 논리가 성립될 것이고, 고난이 없는 것이 축복이라고 판단한다면 그 말에 더욱 동조할 것입니다. 이 땅에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그와 같은 축복관을 추구하겠지요.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청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말씀을 자기 성찰과 함께 적용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인격이 성숙되고 다른 사람의 영혼 구원을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이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 여기서 잘 살아 하나님 앞에 다가서는 자신을 그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삶이 세상적인 가치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가치로 확인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요, 유업을 상속받을 자니까요!

고난에 답하다

사무엘의 분노(삼상13:10-14)

사무엘의 분노(삼상13: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