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청하는 법
며칠 전 지난 주 설교에 대해 오류를 지적하는 신앙질문이 도착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내리지 않는다고 하셨고, 고센을 제외한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셨는데 목사님은 설교에서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면 이스라엘 백성은 멀쩡할 수 없다고 표현한 것은 성경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답변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개인적으로 답변을 해주었다. 그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왜 구분하지 않으셨겠는가? 그러나 옆집에서 재앙을 당해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거나 별 마음이 없이 구경만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첫 번째 재앙이 7일 동안 물이 피로 변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나일강에서 일어났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한 고센 땅은 나일강의 하류로 철저하게 나일강에 의존한다. 엄청난 고생을 했을 것이다. 수돗물이 7일 동안 끊긴다고 생각해보라. 어디서든 물을 구할 수 없다면 7일이 아니라 하루도 곤욕이다. 하나님이 이 재앙을 내리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기 위하신 것인데, 이 재앙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안전했다고만 쉽고 간단하게 말하기 어렵다고 나는 해석했다. 그들도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의 백성’ 즉 ‘신령한 백성’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실 때 같은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신앙으로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봐야 하지만 아픔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를 당하는 것도 같은 땅에서 우리만 구별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하나님은 능히 구별하신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구별해 주시기만을 바라면 실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따라서 이 중심을 갖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바라보되 중심은 ‘나는 하나님의 신령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깊이 감동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현상으로만 우리가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기복적인 면이 다분하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에 이해했다면 내 설교를 잘 따라온 것이다. 오늘 주제를 ‘설교 경청하는 법’이라는 표현을 한 것은 설교를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설교란 무엇일까?
간략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서 따르게 하기 위해 성경을 토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예배의 핵심이며, 목적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 자신이 얼마나 유익을 얻을 것인가가 아니다. 그런 면은 잘 섬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설교를 경청해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해서 설교단에 올라간다.
준비하는 과정이나 노력은 각기 다를 것이다. 그런데 다른 것은 이 밖에 더 많다. 설교는 성경 그 자체가 아니고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설명이기 때문에 그의 신앙, 인격, 지식, 경험, 화법, 정신세계 그 모든 것이 섞여서 나온다. 또 설교는 본문을 택해도 그 본문의 어느 부분을 주제로 삼느냐에 따라 표현되는 것들이 다소 달라질 수 있다. 가령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고 말했다. 설교자가 이 한 절만 다룬다고 볼 때 그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기 쉽지 않다. “왜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달리하듯 하며, 왜 내가 한 사람만 상 받는 그 장본인이 되고자 하는지 아는가?” 다시 말하면 “내가 일등이 되고 싶다.”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이 점을 딱 잡는 데는 상당한 성경 혜안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을 핵심으로 삼을 수 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문제가 되지만, “구원받지 못할까 두렵다.”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가? 대표적으로 잘못된 해석이지만 그래도 이런 해석을 두고 다른 사람들이 난리를 피우지 않는다.(실제로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또 어떤 설교자는 “내 몸을 쳐 복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을 강조해야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방금 말했다. 이처럼 설교는 예술로 치면 정말 종합예술을 넘어 총체적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하나님을 들먹여도 청중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뇌리에 하나님이 선명하게 나타나 그 앞에 경배드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설교는 성공적이 아니다. 그래서 설교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설교가 바른 설교인가?
이렇게 묻는 것은 설교라는 것을 잘 모르고, 설교자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하나이지만 성경을 보는 사람의 눈은 똑같지 않다. 또 거기서 머릿속에 일어나는 반응은 더 변화와 차이가 크다. 주제설교, 강해설교, 주석설교, 제목설교 등등 말하지만 설교하는 방식을 놓고 바르다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경솔한 태도이다. 어떤 설교를 하든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느냐,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나는 강해설교를 하는데 목회를 하면서 나 자신에게나 성도들에게 이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른 설교자가 다른 유형으로 한다고 평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성경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성경은 앞뒤로 재어 봤을 때 딱 떨어지지 않고 상이하거나 상충하는 것들이 있다. 모호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명기서의 저자는 당연히 모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신명기 마지막 장의 모세가 죽은 뒤의 일이 기록된 것은 모세가 기록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요즘 수요일마다 강해하는 욥기는 누가 썼을까? 욥이 썼다고 볼 수 없다. 저자가 명확하지 않은데 성경으로 채택할 수 있는가? 그러나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인했기 때문에 성경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열왕기 상하와 역대기 상하는 서로 관점이 다르지 역사적으로는 겹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 서로 달리 표현된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것도 역시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성령에 감동되어 기록한 저자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고, 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는, 성경으로 인정되었고, 수많은 세월 동안 성경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학자는 학문적 입장에서 접근해서 이런 저런 견해를 내놓기도 하고 그것이 말썽을 일으켜 우리를 혼돈스럽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다 성경으로 받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 안에는 이런 것들이 더러 있다. 설교자가 학자들의 다른 견해를 함부로 옮겨서 설교에서 진리인 양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도의 입장에서
내가 위의 말한 것은 성경이 그런 줄 알라는 말이 아니고 성경을 믿는 믿음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신앙중심으로 오늘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해야 한다. 늘 그렇고 그렇다고 생각하면 영적으로 병들어 있거나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 설교자의 말이 자꾸 마음에 튕겨나가면 그 사람이 문제이든, 설교자가 문제이든 어느 쪽이 문제라고 짐작해도 된다.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으므로 이제 율법은 필요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얼마나 확실한 설교인가? 그러나 이 사람은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도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라고 하셨다. 그 설교자는 율법을 폐한 것이다. 그러면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당연하다. 그러나 두 가지 점을 유념해야 한다. 율법을 지켜도 우리는 부족하다는 점을 느낀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진정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율법 또한 정말 예수님이 오심으로 필요 없게 된 것이 있다.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와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한 번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고, 드리면 예수님의 한 번 영원한 제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둘째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고, 그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고 하신 것이다. 폐했으면 대치하면 되는 것이다. 완성했다는 것은 앞에 것이 존재하고 율법과 우리 모든 부족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의 구원자는 예수시다. 그러므로 이제는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그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주로 신비주의 교회에서 그렇게 설교되어지고 있다. ‘예수님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예수 의지하면 천국 간다!’ 이 얼마나 쉽고 간단하고 듣고 싶은 말인가?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바울의 설교를 보면 그리스도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율법으로 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마치 율법이 이제 폐기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설교를 잘못했다고 할 수도 없고, 또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설교를 하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좋은 소식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이다. 정말 우리는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내 말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율법을 행하는 것이지 율법이 구원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일리가 있고, 어중간한 지식이 실족케 한다는 말도 있다. 자신이 아는 조그만 지식에 갇혀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 두 표현이 다 맞는데 이 표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 깨닫는다면 설교를 경청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설교에 더 깊은 은혜를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은혜의 무궁한 세계를 보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 간절할 것이고, 설교자의 설교의 노력이 눈에 더 보일 것이니까. 우리는 은혜 받아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