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선(線)은 점에서 시작되고, 삶은 순간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며, 역사는 이런 삶들이 모인 산물입니다. 따라서 선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전체를 구상해야 하지만 한 점, 한 점을 어떻게 모을 것인지가 핵심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 한순간이 모여서 되는 것으로 한순간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순간, 한순간은 우리를 망설이게 하고, 또 다른 면으로는 결단을 촉구합니다. 이것은 위대한 사람이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당신의 결정이나 삶의 길목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이 글을 의미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망설인다는 것은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측면은 어떤 결정의 때를 감지했다는 뜻이 되고, 부정적인 측면은 결정하지 못해 우유부단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지금 일어나야 하는지, 좀 더 자야 하는지 침대에서 망설이지 않았습니까? 이 일은 지금 해야 하는지, 나중에 해도 되는지 결정하지 못해 망설이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해도 될 거야.”라고 결정을 내렸지만 미룬 것에 대해 계속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 사람을 사귀는 것이 좋을까?”망설여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저 물건을 살까 말까?”이 또한 망설여지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한다.”“하지 않는다.”로 말입니다. “나중에 한다.”는 일단 “하지 않는다.”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 결정은 결정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의 일이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심지어는 인생에 결정타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우리가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동기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지면을 통해 어찌 다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것에 대해 우리가 한번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내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망설이는 순간은 당신의 결정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결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적장 골리앗을 죽임으로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해방시킨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사위도 되고요.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자리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사위요, 나라를 대신 구한 사람인 다윗을 정적으로 여기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은 방랑자가 되었고, 어린 나이에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거두어야 할 뿐 아니라 사울의 추적을 피해 다녀야만 했습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왕을 자신이 죽이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사울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도망 다녀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중에 자기가 무찌른 골리앗의 나라 블레셋으로 가서 거기 붙어 의지하고 살려고 합니다. 이때 다윗은 인생 중에 가장 크게 망설이는 때였을 것이고, 그는 안 좋은 쪽을 결정합니다. 아마 이 망설임은 그의 마음속에서 혼란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오늘 자신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만 망설임이 깊어지고 그다음에 결정하는 것들 중에는 ‘잘못된 결정(악수(惡手))’이 허다합니다.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결정해서 블레셋 왕에게 찾아가 광인의 흉내도 내고, 치욕적인 명령을 받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서 도망쳐 나오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까지 살아왔고, 인내해왔던 모든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블레셋을 업고 그 후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 했다면 왕이 될 수 있었겠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마음으로 받아들였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상상해보면 다윗의 망설이다 한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기원전 1,2세기를 걸쳐 살았던 중국의 사마천이라는 사람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중국 최고의 역사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는 기가 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신하로 사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항상 경계의 대상인 흉노족들이 쳐들어왔고 그 전투에서 이겼으나 패배하고 돌아가던 흉노족이 가던 길을 돌이켜 돌아와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져버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 조정에서는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항복한 이릉이라는 장군이 있었고, 사마천은 다른 사람들의 성토에 맞서 “어쩔 수 없는 패배”라고 그를 옹호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총사령관은 왕의 사위였고, 이 말은 결국 총사령관이 잘못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말로 오해가 되자 왕은 그를 옥에다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흉노족의 왕이 이릉이라는 사람을 높이 평가해서 자기 사위로 삼고 군사훈련의 책임자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은 들끓었고, 왕은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왕 앞에 끌려 나온 사마천에게 왕은 물었습니다. “사형을 받을래, 궁형을 받을래?”궁형이란 남성을 제거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사형은 죽음이고, 궁형은 삶인데, 그 대신 그는 평생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놀림을 당하고 살아야 합니다. 망설여지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절대 결정의 순간입니다. 그는 궁형을 택했습니다. 그 후 그는 사람들 앞에서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소리가 여성처럼 변하고, 수염이 나지 않았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놀렸습니다. 그의 표현을 보면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장이 뒤틀리고, 집에 있으면 망연자실하고 넋을 놓고 무엇을 잃은 듯’살아야 했습니다. 수없이 “왜 그때 사형을 택하지 않았는가?”“지금이라도 생을 끝낼 수 있다.”라는 자책과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형을 택하지 않고 궁형을 택한 것은 ‘사기’(130권, 중국 최초의 입체적 역사서)를 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단 한 마디가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 죽지만 그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는 왕 앞에서 이 결정을 하는데 얼마나 망설였을까요? 그리고 내린 결정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했을까요? 그럴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망설여지는 순간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말입니다. 그러나 일일이 그 순간순간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이 없이 사는 것은 더욱 좋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취약점은 ‘막연한 기대’이며, 이것은 독약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좋은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 가운데 노력과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없고, 고통을 감내하는 결단으로 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망설임을 벗어나 바른 결정으로 나가는 절대적 기준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과연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이끄신다고 믿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은 능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고, 순종을 요구하시고, 헌신을 통해 축복하시고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정리해볼까요?
우리에게는 망설이는 순간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망설이는 순간은 결정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 망설임과 결정을 의식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행동에 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망설임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기준은 나의 욕망과 타인의 말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의니까요. 위대한 사람들은 망설임에서 머물지 않고 결정하며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들 안에는 신념이 있었을 수 있겠지만, 신앙이 있었던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