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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사무엘과 만나다 (삼상9:10~14)

사무엘과 만나다 (삼상9:10~14)


부잣집 아들인 사울은 사환이 말한 대로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함께 마을로 갔습니다.

(선지자로부터 잃어버린 암나귀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를 듣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마을은 언덕 위에 있어 비탈길로 올라가야 했는데 한참을 가다가 마침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났습니다. “여기 선견자가 있는가?”하고 묻자 소녀들은 답했습니다. “그분요? 당신들이 오기 바로 전에 마을에 들어오셨습니다. 빨리 가보세요. 오늘 산당에 제사가 있으므로 오셨는데 곧 산당으로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산당에서 마을 사람들이 먹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선견자가 와서 축복기도를 하고 난 뒤에야 먹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로 가면 산당으로 출발하기 전에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사울과 사환은 열심히 성읍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성읍에 들어갈 때 마침 선견자 사무엘이 산당으로 올라가기 위해 나오다가 마주쳤습니다.

이 내용 가운데는 묵상할 거리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만 그냥 가서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빨리 가세요.” 이 말은 사무엘이 산당으로 가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사울을 개별적으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해가 져버리면 그들이 찾고자 하는 암나귀는 밤새 야수들에게 잡아 먹혀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라는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라면 우리가 어떻게 해도 그 섭리가 이루어진다고만 생각합니다. 물론 내가 그 기회를 놓쳐버렸을 때 아무 것도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 어떻게 하실 것인지도 알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궁극을 알 수는 없지만 오늘 보여주는 것은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암나귀를 찾아서 숩까지 오고, 그리고 사무엘이 사는 마을까지 왔다 해도, 사무엘은 언제나 사울을 만나기 위해 한가로이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의 사명의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을 만나기 위해서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 하거나 하나님의 섭리를 힘입을 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하고 나의 무능을 고백만 하고 있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요. “오라. 찾아라, 힘써 찾아라!”“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또 하나, 성경 안에서 그들의 제사와 음식문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드립니다. 제사에는 불로 태우는 것이나 또 곡식을 흩뿌리는 것 등등이 있습니다. 이 음식을 하나님 앞에서 서로 나누어 먹기도 하는데

  1. 하나님께 드리고 먹는다.

  2. 하나님의 축복으로 먹게 된 것을 고백하며 감사기도 드린다.

  3.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식사가 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이교도들은 이런 사상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엄격하게 지키지 않았으므로 결국 인간중심이 되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으로, 먹고 즐기는 것이 우선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것 같으나 전혀 다르다는 것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쉽게 정리하면, ‘우리의 축복은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축복 아래 먹고 마시고 산다.’는 고백이 철저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울이 왕이 된 후에 자신이 왕이므로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싶어 이를 어기고 망동을 저지릅니다. 아마 사울의 마음속에는 왕인 내가 제사장직을 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지금까지 사사가 제사장이었으므로 단지 사무엘이 살아있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이 제사를 주도하는 일을 저지를 수는 없겠죠.

마지막으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열심히 마을로 갔을 때 사무엘이 산당에 가려고 나오다가 마주쳤다는 점을 봐야 합니다. 사울이 좀 더 늦게 왔으면 사무엘을 못 만났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이 열심히 올 때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우리의 능력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믿고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그 능력을 마구 행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 신앙인들은 믿음이 좋으면 행함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행함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행함을 내세우고, 그것으로 모든 일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도 그 행함의 도움을 받거나 그 행함에 합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 아닌 전능자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뜻을 행하기 위해 자신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의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바른 태도이죠. 우리는 나와 하나님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의 저변에는 ‘하나님이 내 것에 대해 침범하실까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이며 이기적인 태도이지요. 신앙인이란 하나님께 어느 부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하나님 은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고통과 흉악범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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