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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삼상6:17-21)

법궤를 포획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정복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신도 포획했다는 승리감에 도취했다. 그러나 법궤로 인해 염병이 생기고 사람들이 죽어가자 법궤의 저주라고 판단하고 이스라엘로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럼에도 정말 법궤로 인한 징벌인지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끌지 않는 소 두 마리의 수레에 태워 법궤를 벧세메스로 보낸다. 그 수레가 벧세메스로 곧장 가면 법궤의 저주가 맞고 혹 다른 어느 쪽 길이라도 가게 되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기로 한 것이었다. 벧세메스로 갈 확률은 희박했다. 두 소가 함께 사이좋게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새끼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갈 수 있는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는데 과연 곧장 갈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을 고려해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모든 장애요인이 있음에도 소들을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향한 것이다. 인간의 온갖 방법도 이용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의 저주라는 것을 확인한다 해도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는다. 단지 놀라고 두려워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더욱 굳건하게 믿느냐 하는 것이다.

잠깐 멈추고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의 저주에 대해 얼마나 혼이 났는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법궤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속건제물로 금 독종을 드렸는데, 그들은 법궤 옆에 금으로 만든 악한 종기 모양을 만들어 놓아 법궤 신에게 그것을 바치면서 진노를 풀어달라고 빌었다. 아스돗, 가사,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이곳은 그들의 대표 성읍들이다.)을 위해 각각 다섯 개를 만들어 제물로 바치고, 금 쥐를 만들어 그 외 다른 지역의 성읍들과 마을들을 위해 바쳤다. 수레에 법궤를 싣고 그 옆에 그것들을 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점점 멀어지는 소가 끄는 수레를 바라보고 과연 벧세메스로 향할 것인지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고 수레가 벧세메스로 향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기뻐했다. 반면 벧세메스 사람들은 밀을 추수하다가 소가 끄는 임자 없는 수레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위에 법궤가 있는 것을 보고 환호를 올리며 기뻐했다. 벧세메스라는 마을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국경 부근에 있는 마을로 법궤가 블레셋 땅에서 일으킨 재앙을 이미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진노의 근원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벌하는 법궤가 가까이 오는 것을 기뻐했다. 수레는 여호수아라는 사람의 밭 큰 돌 앞에 멈추어 섰다. 사람들은 하던 일들을 그만두고 수레 앞으로 모여들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얼마나 황홀경에 빠져 기뻐했겠는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업신여기고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으로 여기고 불안에 떨었을 것이다. 블레셋이 쳐들어온다면 벧세메스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제 법궤가 다른 곳이 아닌 자신들의 마을에 도착했으니 마치 자신들이 블레셋에게 항복을 받은 기분이었고, 하나님이 그 마을을 가장 먼저 축복한 것으로 보았다. 레위지파 사람들은 법궤와 금덩어리가 담긴 상자들을 수레에서 내려 바위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수레를 해체해 그 나무를 가지고 번제단을 만들고 암소들을 잡아 번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축제가 벌어진 것이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내놓아 제사를 드렸다.

그 마을이 생긴 이래 이렇게 기뻐해 본 적이 있을까?

하나님의 법궤가 그 마을에 당도한 것이다. 보통 때 같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블레셋 경계에 있는 마을이니까. 그런데 이런 일도 생긴 것이다. 너무나 흥분한 탓일까? 법궤를 본 사람들이 신기해서일까? 사람들은 법궤 안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려고 모여들었다. 순간 그 안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죽어나기 시작했다. 70명이 순식간에 죽었다. 축제가 통곡하는 장례장으로 바뀌었다. 기쁨이 두려움과 혼란으로 바뀌어버렸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곡하며 말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감히 서겠는가?” 법궤 앞에 서는 사람은 블레셋 사람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다 재앙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 법궤를 누구에게 보내야 하겠는가?” 그들은 슬픔과 두려움과 함께 방도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는 다가설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원래 법궤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그 앞에 연기 가운데 어렴풋이 보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잊었을까? 아니면 신앙이 떨어져 법궤를 다루는 교육이 전수되지 않아(이것은 전쟁에 법궤를 가지고 나간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잘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난 행동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렇게 좋아서 들여다보는 것도 심판하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이 좋아서 그렇게 한 것이기도 한데. 그렇다. 하나님은 구경거리가 되지 않으신다. 섬김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은 매우 까다로운 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가져갔고, 그것을 신당에 두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주를 받았다.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사람들은 반가워서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저주를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살폈어야 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저주하시는 하나님으로만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한 것은 내가 좋아한다고 하나님이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놓고 뉘우치는 것보다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놓고 쟁론했고, 결국 가능한 한 멀리하고자 한 것이다. 답은 회개하고 바로 모셔야 하는 것이다. 그랬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기럇여아림으로 사람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와서 법궤를 가져가라고 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법궤는 기쁨이나 신기한 물건이 아니라 위험한 물건이 되었고 가까이하거나 만지기도 싫어진 것이다. 왜 기럇여아림인가? 거기에 대해 설명이 없어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곳이 산 위에 있다는 것과 실로와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두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그들이 산 위에 있으니까 하나님의 법궤는 하늘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그들에게 실로(원래 있던 곳)으로 갖다놓으라고 시킨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벧세메스 사람에게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손쉬운 상대였던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당시 이스라엘은 엘리 제사장이 지도자였고, 그는 이런 것에 대해 자기 아들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들이 배우지 않으려 했기에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법궤 사건은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과 사람들이 법궤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섬기거나 호기심으로 다룬다면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실망할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둬야 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편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축복할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신앙은 누구라도 하나님을 바로 모시면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지 내 기분대로 다룰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성경을 봐야 하는 것도 이 맥락과 같이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무시한다면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을 대할 것이다. 이것은 잘하면 축복으로 갈 수도 있지만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경솔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이시다.

언약궤가 돌아오다. (삼상6: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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