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 동안 언약궤가 블레셋에 있는 동안 블레셋 나라는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언약궤를 탈취하는 것은 곧 승리의 최고의 전리품을 획득하고, 이스라엘 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승리했다고 자부하고만 있을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속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때로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슬픔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겉으로는 승리했으나 속으로는 망하고, 사람들 보기에는 성공을 했으나 실제로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는 경우가 많다.
항상 실속을 생각해야 하고, 진정한 승리를 추구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승리와 패배라는 개념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포획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보면 언약궤가 블레셋에 침투한 셈이 된 것이다.
그들이 언약궤를 돌려보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7개월이 걸렸다.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점쟁이를 불러놓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인지를 물었다. 그들이 겁이 난 것은 본래대로 갖다놓는다 해도 여호와 신이 진노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될 것 같은 당혹스러움에 싸였다. 어쨌든 여호와의 진노를 어떻게 달래느냐 하는 것이 그들이 풀어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전능하신 창조주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를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정리해보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이때는 원시시대였으므로 누구나 그렇듯 신의 진노를 달래는 것을 신앙의 최고행위로 여겼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여호와 신은 보통 신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약궤를 어떻게 돌려놓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언약궤를 돌려준다는 것은 이스라엘 신 앞에 굴복한 것으로 비칠 것이기 때문에 망설였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여호와를 굴복시켰고 이겼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로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는 것은 지난번 확인했다. 분명히 이 모든 불행한 일은 언약궤로 인한 것이고, 여호와의 진노였다. 그렇다면 언약궤를 갖다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마음은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다음의 진노는 더욱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라고 생각하니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은 서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있던 곳으로 보내야 되지 않을지…, 그대들이 말해보게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면 거저 보내면 안 될 것이오. 죄 용서를 비는 속건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 보내야 할 것이오. 그러면 정말 이 신이 벌을 주었는지도 알게 될 것이오.”
“그러면 어떻게 속전제사를 드려야 할꼬?”
“블레셋 성주의 수효대로 악성 종기 모양으로 만든 금 다섯 덩어리와 금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 궤와 함께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켜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국경을 넘어 벧세메스로 가면 이 재앙은 분명히 이스라엘 여호와 신이 우리를 친 것이 입증되는 것이고, 그곳으로 가지 아니하면 여호와 신이 우리를 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점쟁이는 점쟁이다운 해석을 내놨다. 성마다 액땜을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고, 금쥐는 쥐가 병을 옮긴다고 본 것인지 쥐의 재앙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금쥐로 액땜을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는 벧세메스로 보내기로 정하고 그곳으로 가면 여호와가 벌을 내린 것이고, 소가 다른 곳으로 가면 그것이 아닌, 즉 우연히 생긴 전염병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소 두 마리를 끌어다 수레를 끌게 하고 그 송아지들은 집에 묶어놓았다. 수레에는 궤와 금쥐와 악성 종기모양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실었다. 사람이 이끌지 않고, 두 마리 소는 수레를 끌고 갔다. 정말 사이좋게 벧세메스로 수레를 끌고 갈 것인가? 그 소들은 곧장 벧세메스를 향해 갔다. 암소가 울면서 가면서도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성주들은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을 보면서 벧세메스의 경계선까지 뒤따라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소들은 이끄는 사람이 없이 사이좋게 한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소들은 새끼들이 우는 소리를 들었을까? 암소는 새끼가 그리워서 울었던 모양이다. 이 모든 발상은 블레셋 점쟁이로부터 나왔으나 그대로 되었다. 이방 점쟁이도 영험이 있다고 치켜세우거나 존경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신앙이 바로 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보고 어쨌든 영적인 사람이라고 우대하는 경향이 있다. 신앙이란 바른 것이냐 아니냐를 절대적으로 가르는 경계선이다. 아무리 대단한 이적을 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시단의 일이며, 그것은 결국 인간을 기만하는 수단으로 쓰일 것이고 인간을 궁지에 몰아넣게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엉터리 같은 그들을 술수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일까? 사단의 역사가 맞아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도 그들과 내통하면서 사용하시는 것일까? 답은 이렇다. 비록 그들이 악하고, 사단의 술수를 보인다하더라고 하나님은 그 어느 것이라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가장 악한 것이 가장 선한 것을 이루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선한 일을 이루는 데 사용되었다고 그것은 선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우매를 많이 범해온 것이 사실이다. 한때 이단이 기독교인들을 불리는 데 일조를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이단으로 몰려들었다.
그 당시를 보았을 때 이단은 가장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첨병으로 여겨졌고, 하나님의 손에 쓰임을 받는다고 사람들은 존경을 보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칭찬하셨을까? 하나님이 바벨론을 사용해서 유다를 징계하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바벨론을 좋아하시는 것일까? 본질을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 수단이나 나타난 현상에 마음이 쏠리면 우리는 착각해서 잘못된 믿음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을 하나님이 막아주지 않으셨다거나 하나님이 인정하셨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단지 이용했을 뿐이며, 이 이용이 곧 그들의 신분을 인정하거나 그들과의 관계가 좋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 어떤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비에 끌려간다. 어느 순간 나의 모든 신앙이 헛된 것을 좇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은 멸망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를 믿고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며, 그를 숭배하고 온전히 함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