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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삼상5:6-6:1)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긴 블레셋은 법궤를 전리품으로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갖다 놨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신인 여호와를 잡아다가 다곤 신에게 바친 셈이었다. 그러나 포획되어 온 법궤로 말미암아 다곤 신상이 넘어지고 깨어지는 일이 발생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런 일이 계속 되었다. 그렇게 되자 겁이 난 다곤 신전에 드나드는 제사장들이나 사람들은 여호와 신을 깨워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문지방을 밟지 않고 살짝 살짝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아스돗 일대에 악성 종기가 사람들 사이에 전염되어 퍼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지나치게 종교적인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을 우연한 일로 여기거나 혹은 그 일에 사로잡혀 아무 일도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현재 같으면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우연히 나타난 것처럼 보여도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사죄하라는 말은 아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것을 놓고 사죄하고, 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막연한 사죄는 그 사건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모든 것이 원래 죄악의 자리로 돌아간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하게 돌아간다. 그것은 반작용과 같은 것이다. 그 동안 중단했던 죄를 몰아서 짓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내가 벌 받은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어렴풋이 정리해버린다. (이런 사람은 또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무조건 잘못을 빌고 또 돌아가는 반복적인 행위를 한다.)

블레셋사람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가?

그들이 내린 진단은 ‘이스라엘 신인 여호와가 우리의 신인 다곤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발생해서 자기 모두를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이런 곤궁에서 벗어나는 해결방법은 여호와의 법궤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방백들이 모여 의논하고 일치를 보아 법궤를 가드로 보냈다.

가드는 블레셋의 중심도시이므로 작은 도시에서는 여호와가 힘을 썼지만 가드라는 큰 도시에서는 자신들의 더 큰 신들이 있으므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곧 잘못된 것으로 판명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을 앓았고 더 큰 성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줄 알았으나 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혼란에 빠졌다. 지도자들이 다시 모였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접경 마을로 보내자. 아마 법궤를 고향 근처에 두면 진노를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들은 지금의 이런 재앙이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시인했다. 그리고 해석은 이스라엘에 있어야 할 법궤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여호와가 화를 낸 것이며 그 해결책은 고향 가까이 두면 어느 정도 진노를 달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법궤는 에그론이라는 곳으로 옮겨진다. 에그론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그 두령들을 원망했다. “두령들이 자기 도시가 재앙 받지 않기 위해 법궤를 우리 마을로 보냈다. 그래서 우리를 죽이려한다. 우리가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이제 여호와는 재앙의 신, 그리고 진노의 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최소한 블레셋 온 백성들에게는 그렇게 인식되었다. 에글론에서도 같은 일들이 벌어졌고 그곳도 다르지 않게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그곳 사람들은 두령들에게 항의와 호소를 담아 법궤를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두령들은 다시 모였다. 결국 그들이 내린 최종적인 결론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서 이 재앙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종기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의 소리가 온 성에 퍼지고, 민심은 흉흉해지고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죽은 사람은 죽음의 애곡으로 가정에서 울려 퍼졌고, 죽지 아니한 자들은 종기의 고통의 소리로 성읍을 가득 매웠다. 이런 고통과 애곡의 소리가 하늘에 사무칠 정도였다.

우리는 쉽게 몇 가지의 교훈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그 수준의 극복방법밖에는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

블레셋 사람들은 여기서 문제되면 저기로 옮기는 방법을 생각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그러나 그것은 악순환이었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최소한의 손해 즉 에글론으로 보내서 여호와 신이 분풀이를 할 수 있게 희생의 제물로 드린다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자기와 같은 감정을 가질 것으로 짐작한 것이었다. 이 모든 방법이 통하지 않자 그들이 내린 결론은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생각한 최대의 양보였다.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면 화가 풀릴 것이다!

정말 하나님은 그런 분인가?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는 교훈과 블레셋에게 주는 교훈이 각각 있다. 우선 이스라엘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한 도구로서의 법궤이지 하나님은 법궤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며, 법궤를 가지고 있다고 무조건 하나님이 승리케 하시는 의롭지 못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블레셋에게는? 그들은 하나님을 이겼다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 그러나 정말 너희가 나를 이긴 것이냐? 하나님은 그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 지역의 신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장난에 놀아나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은 항상 그 앞에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매여 있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시면 축복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의 신앙을 한번 점검해보라.

회개 기도 방식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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