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ile_circle.png

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나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나요?

Q.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감사하고, 구원 받았다고 믿고 살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주일 말씀, 구역예배에의 나눔, 말씀읽기를 통해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지인으로 부터 들은 어떤 질문으로 부터 의문이 생겨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 다 소용없는 것인가? 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가? 하는 답답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해들은 말은 이것 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4절에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라는 부분을 보며 부자도 분명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아브라함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부자는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고, 천국에 가지 못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야 한다. 진정한 성화의 길에 도달하지 못하면 천국에 갈수 없다. 성화의 길에 도달하면 내 삶이 완벽하게 바뀌어야 한다. 내 삶이 완벽하게 바뀌지 않았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맞지 않고, 성화의 단계에 들어가야 한다! 를 강조하였습니다. 성화의 단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고, 더 나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결국에는 다 천국에 갈 수 없다. 구원이 없다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나님 아닌 누군가 판단할 수 있는가?
그 말을 전한 분도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죽음직전에 하나님을 영접한 자들은 천국에 갈 수 없는가? (지인은 그건 모르지만, 말로서 시인한다고 갈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삶이 완전히 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등
여러 의문사항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게 여쭙니다.
목사님,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나요?

A.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의 핵심은 ‘아무리 세상에서 잘 살아도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면 거지 나사로보다 못하고,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을 향해 부르는 것을 보면, 아무리 아브라함 후손이라 할지라도 못가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함으로 구원받는가, 믿음으로 구원받는가와 거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단순히 시인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믿음은 활동력이 있어 믿음에 따른 행동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럼으로 점점 성화로 나아가게 합니다. 성도의 성화의 기준과 목적점은 모두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합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 ‘믿습니다.’ 한 마디만 하면 구원받는다고요?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사실이며, 그 믿음의 판단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진 믿음이 불안해지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으면 믿는 것이고, ‘믿음만 가지고’라는 궤변적 주장을 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야고보는 이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음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자의 대표가 예수님 옆 십자가에 달린 죄인이었습니다. 주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주옵소서.”라고 하자 주님은 “내일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죠. 이것을 “이런 자도, 이렇게도 구원을 받는구나.”라고 해야지, “이렇게 하면, 혹은 이렇게 해도 구원받는다.”라는 식으로 공식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자신의 집 앞에서 구걸하는 불쌍한 나사로의 존재도 무시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도 어기는 것이고, 하나님과 내일의 천국을 의식하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천국도 있고, 지옥도, 지옥의 고통도 있고, 더욱 놀란 것은 존재조차도 무시했던(아마 속으로 늘 비난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시조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서야 나사로와 안면이 있는 것을 이용해서 나사로 손에 물 한 방울만 찍어 자신의 목을 적셔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 극단적인 대조는 이 땅에 황제로 사는 것은 거지 나사로가 꿈도 꿀 수 없는 삶이었지만, 막상 천국 가면 그것은 의미를 잃게 되고, 비록 이 땅에서 비참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천국의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라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세상에 잘살기 위한 수단적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나사로는 비록 이 땅에서는 헌신짝처럼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었기에 믿음의 조상 품에 안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의 비유는 진짜 무슨 삶이 더 중요한지를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입으로나 생각만의 것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땅은 힘들어도 잠깐 머물지만 천국은 믿는 사람이 가야할 궁극적인 자리입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신앙상담 질문은 이메일: bethel0691@hanmail.net으로 보내주세요.

결핍과 도전

우월함은 방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월함은 방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