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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성탄절 선물

성탄절 선물

어린 시절 12월에 들어서면 길거리 전파사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 소리는 길 가는 모든 사람을 흥분시키고 남았다. 기독교 교인이든 아니든 연말과 맞물리는 크리스마스는 마음을 들뜨게 하고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그러나 항상 나는 그렇지 못했다. 모든 것이 나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뭐라 핑계할 수 없다. 학교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의 성적은 연말이 오면 우울하게 만들었고, 성탄절 행사에 끼지 못한 나는 여기서도 소외감을 느꼈다. “왜 나를 뺐을까?” 잘 모르지만 선생님들이 생각할 때 앞에 세워 발표할 만한 아이가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그러했다. 그런데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성탄절 전야에 부서별로 함께 모여 선물을 나누는 파티가 벌어지는데 나는 거기도 소외되어야 했다. 선물을 살 돈도 없었고, 돈을 가져도 무슨 선물을 사야할지 정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조르는 성격이 못되었던 나는 선물교환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다 어머니가 쉽게 내주지 않는다 싶으면 포기해버렸다. 때로는 선물 살 돈이 내 손에 들어와도 무슨 선물을 산단 말인가? 정말이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돈 없는 것도 어렵지만 돈이 있으니 더 어렵다는 것을 그때 깊이 느꼈다. 그래서 전야 파티에 빠지기 일쑤였다. 스스로 외톨이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외로운 섬처럼, 추운 날에 쫓겨난 아이마냥 서글펐다. 성탄절, 예수님이 오신 날에 왜 선물교환을 해서 나를 슬프게 하는 거지? 나에게는 기쁜 성탄절이 아니라 우울한 성탄절이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내게 어울려도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아니었다. 교회도 부르주아들만의 장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탄절이 되면 오히려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주고 불러 모아 함께 즐거워해야 하는데 왜 선물 없는 사람은 오지 못하게 할까? (사실 갈 수 있었다. 부끄러워서 안 갔다.) 성탄절에 왜 선물교환이라는 것을 할까? 먼 훗날 깨닫게 된 것이지만, 아기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하면서 선물을 드린 것을 보고, 성탄절 서로 기쁨을 나눈다는 뜻에서 행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요망스런 내 생각이 이렇게 돌아갔다. 그 동방박사들이 선물한 것 때문에 선물할 수 없는 내 인생이 괴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잘난 그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예수님께 드렸다고 해도 아기 예수님이 그것을 사용했을까? 괜히 그 짓을 함으로 어중간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드릴 생각은 안 하고 서로에게 주고받으면서 자기끼리 즐거움에 도취하는 꼴을 정말 예수님이 좋아하실까? 내가 탄생했는데 나는 뒤로 제쳐 두고 너희들끼리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깔깔대고 즐거워하는구나. 그래서 소외된 자끼리 만나기로 했다. 예수님과 나! 우리끼리 성탄절을 보내기로 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서로 가진 것이 별로 없으니까 뭘 선물로 하면 될까? 선물이 없으면 무엇으로 하면 될까? 아니면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면 될까? 소공녀처럼 성냥불을 켜고 어두운 방에서 영으로 가득 계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까? 나는 소공녀도 되기 싫고 파트라슈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드릴 것이 없어요. 지금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믿음과 경배이겠지요?” “그렇지. 그것이 가장 좋은 선물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영혼은 어떨까요?” “좋지, 그런데 어떻게 줄래?” “주님을 전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선물이 된다고 할 거지?”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고, 또 주님께 돌릴 수 있는 올바른 선물이니까요.” 그 사실을 확인하자 성탄절은 밝아졌다. 이것은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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