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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갈등과 다툼

갈등과 다툼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교와 대립, 갈등과 다툼의 연속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 입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도 두 대립이 존재하며 싸워서 한 쪽이 이기는 것이고요.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나 취직하는 것도 경쟁이라는 다툼 아닌 다툼을 통해서 이긴 자에게(그 판정이 잘된 것이든 아니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경쟁에서 이기고 나서 상급학교 진학이나 입사를 하면 그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경쟁이 시작됩니다. 때로는 나 자신과 때로는 동료와 때로는 타회사와 대리전을 치르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사랑할 때도 쟁취해야 합니다.
서로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키워나가면서도 다른 방해자가 끼어들지 않는지 신경이 쓰이고, 내가 사랑을 베푸는 대상이 나 외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지, 그 마음을 끌어들이기 위해 보이지 않는 상대와 경쟁을 해야 합니다.

이것뿐인가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배우자가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하는지 , 사랑에 만족하고 충성하는지 언뜻언뜻 불안해집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너무 야속합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쌓였다가 다툼으로 번지지요. 그리고는 그래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면서 적당히 협상하고 휴전을 합니다.

우리의 갈등과 다툼은 처음에 적응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고 봅니다. 아기가 태어나 이 세상 환경에 적응해서 살기 위해 많은 질병들을 이기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다투듯 노력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몫을 찾기 위해 적응하려는 노력이기도 하고요. 그 다음에는 나의 유익을 얻기 위해 쟁취의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다보니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왜 싸우는 존재로 태어나는가?” 혹은 “왜 인간은 싸우는가?”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 존재를 위해 싸우는 것은 일차 단계라고 본다면 이 단계가 해결되면 다툼이 끝나지 않고 이차 단계의 다툼이 시작됩니다. “내가 옳다.” “넌 아니야.” 등의 다툼입니다. 이런 다툼을 보면 자기의 고집이나 신념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타인이 자기와 일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 마음에는 욕망들이 있는데 정신적인 욕망에는 ‘믿음’ ‘기대’ ‘편’ 등이 있겠지요? 그래서 다툼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 편’ ‘우리 편’이라는 정서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그래서 안정되고 강한 편을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죠.

이런 마음이 너무 강하면 ‘타인보다 내가 낫다.’에서부터 시작해서 ‘나와 일치하지 않은 사람은 나쁜 사람’ 더 나아가면 ‘내 편이 아닌 쪽은 없애야 한다.’는 식으로 발전합니다. 연인과의 관계가 깨지면 굉장히 타격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런 우리 편의 계약이 깨진 것으로 배신감을 느끼고 그렇게 만든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배신한 측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하려 하겠지요.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하며, 살 수밖에 없는가?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태도일까’라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선, 자신의 중심을 갖는 것이지요. 자신의 중심을 갖지 않으면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감정이 생기고, 그것이 또 나와 관련되면 휘둘리기 시작합니다. 자기중심을 가져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심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래도 내 갈 길을 알고 가고 있는 사람은 그런 일들은 방해가 되지만 그 방해에 종노릇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중심을 갖느냐고요?

이것은 인격의 문제이기 때문에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나름대로 중심을 구축해온 사람은 그 중심이 잘 흔들리지 않지만, 며칠 만에 혹은 금방 자기중심을 갖기로 한 사람은 갈등 앞에서 이 중심 자체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될 것이니까요. 나는 바른 신앙 안에서 세워진 사명으로서의 자신의 중심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뭐가 그리 거창하냐고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만큼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신념이나 의지의 가장 중심부에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앙이 바르지 않으면 미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신봉하는 것에 나 자신이 속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목적에 맞춰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기로 했다는 믿음의 중심을 가지게 되면 일어나는 모든 일의 다툼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피할 수 없는 다툼을 얼마나 잘 다루어나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협상’입니다. 이번에는 후퇴, 용서, 인내 등은 전략이기도 하지만 상대방과의 관계를 파괴하지 않고 더 좋게 만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마케팅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해도 화를 내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와 싸우려고 들지 않습니다. 목적은 내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파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오늘은 성사가 잘 되지 않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을 수 있고, 좋지 않은 소문이 나면 이득될 것은 없기 때문에 절대 오늘 다툼이나 다툼의 감정에 자신을 내몰지 않습니다. 이것을 좀 더 좋게 표현하면 ‘협상의 기술’이라고 할까요?

사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협상의 기술이 필요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이것을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협상의 예술’ ‘예술적 협상’이라고요. 오늘 싸움이나 다툼에 이겼지만 실제로 지는 경우가 많고, 자신의 감정은 풀었지만 실제 일은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은 일들이 주변에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잘못하더라도 하나님이 해결해주시기를 바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도하심을 받고 더 좋은 쪽으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결국 천국에 가지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이렇게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잘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동행하지 않는다면 정말 예술적으로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늘 마음을 열고 뜻을 바라보고, 그 뜻 앞에 자신을 갖다 놓고, 기도하면서 인도하심을 받으면 다툼의 희생자가 아니라 다툼과 경쟁 가운데서도 진정한 목적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다(2) (삼상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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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과 영원을 향해 한 걸음 내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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