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사요, 제사장인 사무엘도 늙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이 죽고 난 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누가 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사무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요엘이고 둘째는 아비야였습니다.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전통으로 보면 그의 아들들이 나라를 이끄는 것이었으나 백성들은 그 아들들에게 신망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처럼 행하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판결해주는 타락한 일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함께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왔습니다. “제사장님 보십시오. 제사장님은 늙었고, 제사장님의 아들들은 당신을 닮아 선을 행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변의 여러 나라가 그러하듯 우리에게 왕을 세워 그가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사무엘은 그런 요구는 이방의 풍습이라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께 여쭈어 보겠고, 그리고 답을 주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어라. 그들은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내가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행사에서 나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김같이 너에게도 이렇게 행하는구나.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주어라. 그러나 왕이 다스리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경고해줘라.”(9)
위의 내용 가운데 당신은 무슨 교훈을 받게 됩니까? 간단하게 3가지 정도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 사무엘의 아들, 엘리의 아들
사무엘 아들들 요엘과 아비야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처럼 청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고 뇌물을 받았을까요? 선이란 자동적으로 유전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를 보고 자란 자식들은 대체적으로 성격적 유전을 갖지만 특히 인격적인 면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연마해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좋은 점을 보고 배우고, 그렇지 않은 점을 자신에게는 나타나지 않도록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형태를 종종 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제사장인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를 드릴 때 제단에 붙일 불을 아무데서나 가지고 오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 불에 타 죽었고,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단에 드려질 제물을 갈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 전쟁에 나가 전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아들은 아버지가 아무리 훌륭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엘리는 대를 잇지 못했고, 사무엘도 마찬가집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잘 살면 하나님은 내 아들을 알아서 돌봐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직무유기와 같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선순위이지만 자식을 돌보는 것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에 큰소리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알고 노력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나에게서 끊어지지 않게 말입니다.
2.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
사람은 항상 더 좋은 것에 눈길이 가고, 다른 사람의 것이 더 좋아 보이는 특이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경쟁이라는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도 과거 자신들이 종살이 했던 그 눈에 보이는 위대한 애굽 왕국을 그리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40여년 만에 가나안에 입성해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변 나라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등은 모두 왕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멋져 보였던 모양입니다. 세상의 왕들이 늘 그렇듯 자신을 섬기게 하기 위해 자신을 위대하게 보일 필요가 있었죠. 왕관을 쓰고 멋진 옷을 입고 주위에 호위 군사를 거느린 모습은 위용이 대단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어려움이 생기면 지명을 받게 되는 사사(어느 때부터는 고정이 된 것 같습니다.)는 아무런 권세를 가지지 않고 단지 의용군을 이끄는 전사로, 이스라엘 나라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재판관으로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았고, 초라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이 왕이고, 각 지파의 장로나 사사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비교하고 나타난 것을 전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믿음조차 없으면 자신들을 얼마나 비참하게 보았겠습니까? 지금까지 백성들 나름대로는 좋은 사사가 나타나 이끌면 좋으나 그렇지 못할 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아니고서는 붙들 것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오늘 백성들이 인간 왕을 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신앙을 견지할 자신이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점을 지적합니다.
당신도 하나님을 신앙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세속적인 것이 위대해 보이고, 그것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주는 결말이 무엇인지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입니다.
3. 세상 왕이 우리를 다스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세상의 왕은 가능한 자기를 최고로 나타내 보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따르니까요. 존경해서 따르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외형의 위용으로 사람을 제압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걸맞지 않다는 것을 알 때는 반란이 일어나지만 말입니다. 평민의 눈으로 봤을 때는 찬란한 왕관과 왕복을 입은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것은 황홀하고 자신들을 잘 보호해 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내야하고, 늘 그렇지만 그들은 필요이상의 세금을 포탈해 갑니다. 자신들을 보호해 줄 왕을 구했으나 자신들을 압제하고 이용하는 왕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것을 하나님 자신과 비교했습니다. 하나님을 뒤로 제치고 눈에 보이는 왕을 구함으로 결국 어떤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인가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실패하는 것은 외형에 치우치고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상의 힘을 추앙하면서 진정한 힘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려주고 그래도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하는 대로 되어 힘든 과정을 겪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되겠지요. 그 사이에 선지자들을 주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실 것이고, 모범적인 왕을 통해 진정한 왕의 이미지를 살피고 추구하겠지요. 이것이 그들의 바람이 틀리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