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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석 목사

세상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목회철학이며, 나의 염원입니다.

소개 및 철학

요나단이 블레셋을 공격하다.(삼상14:1-23)

요나단이 블레셋을 공격하다.(삼상14:1-23)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각각 정해진 곳에 포위하듯 주둔했는데, 본대는 예루살렘의 북쪽 높은 지역 믹마스라는 곳에서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위협하고 있었다. 사울 왕이 이끄는 이스라엘은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그 옆 베냐민 지파의 게바에 모였는데 수는 600명에 불과했고 그들이 가진 무기는 삽과 괭이 몽둥이들이었다. 이미 블레셋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쇠로 된 무기를 만들 수 없게 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상당 부분 블레셋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블레셋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완전히 정복해서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자 했다.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은 대항할 힘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고스란히 나라를 넘겨줄 수 없으므로 어떻게 하든 막아내야 하는데 뾰족한 수가 없어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치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아버지인 왕에게 알리지 않고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의 사이에 있는 험한 보세스라는 큰 암반으로 자기 호위병을 데리고 블레셋 진영으로 잠입해 들어가 쳐서 그들을 교란시키고자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결의에 찬 모습으로 적진을 향했고, 동행하는 호위병은 “왕자님의 마음대로 행하십시오. 저는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겠습니다.”고 했다. 요나단은 다시 말했다. “자, 이제 우리가 바위를 타고 건너가는 모습을 블레셋에게 보이도록 하자. 우리 자신을 보였을 때 블레셋 군인들이 ‘거기 서라! 당장 죽이겠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멈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올라와 봐!’라고 말하면 그들을 향해 공격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신호이다. 바로 이것이 표징이다.” 무슨 근거로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있다 설명하도록 하고, 요나단은 그의 호위병을 데리고 바위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블레셋 군인이 요나단 일행의 모습을 봤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이리 올라와라.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이 말을 들은 요나단은 “하나님이 블레셋 군대를 우리 손에 넘겨주셨어.” 하며 호위병과 함께 바위를 타고 올라가 블레셋 군대를 쳤다. 반나절 정도 동안 두 사람이 죽인 블레셋 군인은 20여 명이 되었다. 이것을 본 블레셋 본대 군인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고, 그때 땅이 진동하며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요나단의 믿음과 행동이다. 두 가지 정도 정리할 수 있는데, 요나단의 믿음은 간단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도전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소위 우리가 가진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강력한 도전력을 갖지 못한다. 그냥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 좀 더 나은 쪽으로 생각하려는 마음을 믿음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믿음에는 행위가 없으면 죽은 것인데, 그 행위는 죽음만큼이나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믿음은 반드시 역사가 있어야 한다. 믿음의 시작은 마음에서부터 생각으로 이어지지만 믿음이 믿음으로 인정받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사실 행위라는 열매로 믿음을 평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믿음의 공수표를 만들어 낼지 모른다. 상황이 좋을 때는 큰소리로 믿음을 내세우지만 상황이 어려우면 믿음이란 장독 뒤에 숨어버린다. 이런 점에서 요나단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믿음을 가진 것에 대해서는 놀라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치기이든, 성령의 감동이든 우리가 이 자체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말을 확인해보면 그래도 청소년이거나 20대 초반이었을 요나단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은 수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단순한 감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이끄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보아야 옳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진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데 만약 요나단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기도만 하고 있었다거나 하나님의 역사하시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 편에서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방식을 잘 쓰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신앙은 항상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를 유지하면서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야고보서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 옳은 일이다. 물론 하나님은 기도만 하게 하실 수 있다. 또 우리가 나서지 않는 것이 믿음의 행위가 될 때도 있다. 요나단이 자신의 모습을 적에게 드러내면서 바위산을 오를 때 “와라”고 블레셋 군인이 말하면 하나님이 올라가 싸우라는 뜻이고, “거기 섰거라.” 하면 올라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개인의 판단이었을까? 성령의 감동이었을까? 오늘 새벽에 꾼 꿈이 좋으면 하나님이 오늘 내가 하려고 한 것을 하라시는 것으로, 꿈이 나쁘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닌가? 오늘 날씨가 좋으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뜻이고, 날씨가 흐리면 시행하려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을 무속적인 방식이라고 한다. 그러면 요나단은 무속적 신앙이었을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유대인은 유대인으로서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치기 위해 쳐들어왔으므로 그들을 향해 주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우림과 둠밈처럼 블레셋의 반응을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분했던 것 같다. 마치 우리가 ○×를 점치는 것처럼. 그러나 그가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도울 것이라는 믿음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전쟁의 승리는 수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기반이 중요하게 작용했고, 그의 행동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이다. 요나단은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이 블레셋으로부터 나왔고, 블레셋 군인들은 이스라엘 진지에서 나온 자임을 알았고 요나단 일행을 보고 얕잡아 보고 올라오라고 놀리듯 말했다. 자신들의 군사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상대라고 판단한 것이다. 상상해 보라.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군대의 비교, 침공해 온 블레셋을 향해 올라가는 요나단, 호위병을 동행하고 단 둘이서 적진을 향해 갔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승리는 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이룬다는 것이다. “오라!”, 전쟁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고 바위산을 오르는 요나단!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실제 이와 같이 행하는지는 그의 믿음의 실체가 드러내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요나단의 용맹을 보라. 과연 그가 믿는 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름답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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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때 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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